비밀의 숲 테라비시아
감독 가보르 츄포 (2007 / 미국)
출연 조쉬 허처슨, 안나소피아 롭, 주이 디샤넬, 로버트 패트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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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둥거리다가 케이블에서 하길래 봄. 안나 소피아 롭은 아무래도 찰리와 초콜렛 공장 때문에 얼굴이 익숙했고, 조쉬 허처슨은 여기서 처음 봤다. 원작 소설은 안 읽었다. 처음에 광고 하는거나 포스터 같은건 이전에 봤었는데, 그거 때문에 난 나니아 연대기나 해리포터 같은 완전한 판타지일 줄 알았었다. 그런데 보고 나니까 그게 아니더라. 오히려 한 소년의 성장기 같았다는 느낌.

  여자 형제들로만 북적대는 가난한 가정에서, 꼭 어설픈 서열에 끼인 제시(조쉬 허처슨)는 학교 생활마저도 평탄치 않다. 내성적인 성격의 이 남자애가 학교에서 겪는 고난들은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시하고 신경을 끄고 있다는 느낌. 학교에서 유일하게 신경을 쓰고 좋아하는 건 에드먼즈(주이 디샤넬)선생님을 보는 것 정도. 그리고 달리기. 제시의 고민은 오히려 집안에 있는 것 같다. 아버지(로버트 패트릭)와 뭔가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데 제시는 항상 그걸 못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여자 형제들에게만 관대하게 뿌려지는 것 같이 느껴지고. 특히 모든 관심을 막내동생인 메이벨(베일리 매디슨)과의 비교가 제시를 더욱 외롭게 한다. 이러한 아버지의 무관심때문에 사춘기를 맞이한 소년이 남자로서 성장하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에 갇혀버린 제시는, 옆집에 이사온 레슬리(안나소피아 롭)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세계를 넓혀나간다. 어리석어보이는 테라비시아의 설립은 레슬리에게보단 제시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던 것 같다. 팍팍한 일상에 순응하며 살아가던 제시가 현실 외에 좀 더 다른 것을 보게 되었달까. 학교의 지배자인 재니스(로렌 클린턴)에게 대항할 생각도 하게 되고 말이다. 제시는 아버지 대신 레슬리와의 모험을 통해 성장의 새로운 지표를 열어나간다.

  그러던 중 에드먼즈 선생님이 제시에게 미술관에 같이 가자고 청하고, 그곳에 가게 될 때 레슬리를 두고 가면서 사건은 어두워진다. 제시가 없는 새 레슬리에게 일어난 사고는, 제시가 여태까지 가졌던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다. 제시가 잠시나마 소유했던 희망의 세계는 그런 식으로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다. 제시는 크게 울지도 못하고, 레슬리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망설이는 것만 같다. 그것의 해소를 가능케 하는 것은 결국 아버지와의 진정한 만남이다. 테라비시아에서 홀로 모험을 하던 제시는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제시의 아버지는 그제야 제시와 진정한 교감의 일부분을 보여준 것 같다. 갈 데 없던 제시의 방황은 아버지를 만남으로 인해, 새로운 재구축의 방향을 갖게 되는 듯 했다. 그래서 메이벨에게 공주님의 자리를 내줄수 있었던 것일테고.

  급작스럽게 내용이 암울해지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참 잔잔하게 흘러가는구나... 싶었는데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 갑자기 던져져서 놀랐다. 막판에 가서는 나도 모르게 이거 판타지겠지? 라고 바라게 되었달까. 그런 기분이었다. 영화가 나쁘진 않았는데 크게 재미있지도 않았다. 다소 지루한 느낌이 있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마음에 들었던 게, 난 이런 타입의 성장 영화를 꽤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덧. 볼 때 생각했던건데, 남들이 제시와 레슬리가 노는 꼴을 봤다면 당장 정신병원에 연락했을지도ㅋㅋㅋ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감독 시드니 루멧 (2007 / 영국, 미국)
출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에단 호크, 앨버트 피니, 마리사 토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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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드 블로그에서 하는 시사회에 당첨되어 다녀왔다. 시사회만 한 게 아니고 진중권 교수와 함께 하는 시네토크도 있었음. 영화 2시간, 시네토크 1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시네토크라는거 영화에 대한 해설도 되고 좋긴 했다. 하지만 관객들과의 토론은 그저 그랬음. 도대체 저 질문은 왜 하는가? 싶은 수준낮은 질문들도 많았다. 아무튼, 이 영화 2007년 영화인데 좀 뒤늦게 개봉한다는 감이 있지만, 뭐 여러 상들을 휩쓴 영화 답게 영화는 좋았다. 시드니 루멧은 어떻게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이렇게 잘 빠진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걸까. 광화문 시네큐브 단독개봉이라는데 그게 아쉽다.

  영화 제목은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반 시간이라도 천국에 가 있기를.' 이라는 아일랜드 속담에서 나온 것이라 하는데, DJUNA의 영화평 아래 달린 사족을 보면 아일랜드 건배에서 나왔다고. 'May you have food and raiment, a soft pillow for your head; may you be 40 years in heaven,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어느 게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앤디(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와 행크(에단 호크)의 팍팍한 일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앤디는 번드르르한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약때문에 횡령했던 회사 돈을 감사가 나오기 전에 메꿔야 하고, 에단 호크는 애당초 가난하다. 누구나 한 번쯤 돈이 궁할 때 범죄를 저지를 상상을 해 보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걸 실행하느냐 마느냐겠지. 그리고 이 형제들은 실행한다.

  앤디가 생각한 대로 모든것이 잘 풀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화는 결코 그렇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보안이 허술한 부모님의 보석상을 턴다. 이 보석상엔 나이든 노파인 점원 한 사람만 있을 테고, 총은 장난감 총을 가져갈 것이다.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앤디가 행크를 조용히 꾀어낼 때만 해도 이 계획은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저지르는 자그마한 실수들은 우연과 섞여 전체적인 그림을 뒤섞어 버린다. 작게는 그 날 출근한 사람이 점원이 아닌 엄마 나넷(로즈마리 해리스)였다는 것부터, 앤디가 행크에게만 일을 맡겨버린 것, 행크가 친구인 바비(브라이언 F. 오바이런)을 끌어들인 것, 앤디가 장물상에게 명함을 준 것. 행크가 앤디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모든 사소한 일들은 결국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연쇄작용에 힘을 실어준다. 그리고 이것들이 초래한 재앙은 그 재앙만으로 끝나지 않고, 더 큰 재앙으로 등장인물들을 몰아갈 뿐이다. 형제가 원했던 건 지금의 경제난을 해결할 돈 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소한 실수만으로 보면 행크의 더 많았긴 했지만, 앤디가 행크를 몰아세우는 장면에서는 좀 속이 쓰렸다. 애당초 시작점이 앤디였던 것을 생각하니 더 그랬을지도. 나는 과정보다 결과와 시작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앤디가 평소 생활에 만족했다면, 아내(마리사 토메이)와의 성관계에 만족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뭐 행크는 혼자서는 그럴 배짱도 없는 사람이다. 경제난에 휘둘리긴 했지만 실제 실행하는 데 있어서는 몇 번이나 망설이고, 결국은 친구까지 끌어들였으니까. 보는 내내 은자와 헉 행크 찌질해... 를 외친 것 같다. 거기다 형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바람까지 피우는 걸 보면 기가 차는 캐릭터였음. 아버지인 찰스(알버트 피니)가 행크를 더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앤디는 그거 때문에 또 열등감을 가지기는 하지만.

  가족 내에서 어머니가 죽었다는 작은 재앙이, 원래 묻혀 있던 재앙의 뿌리들을 끄집어냈다는 기분도 들었다. 이미 뿌리가 튼튼치 못했던 가정이 그 이후에 더 크게 흔들리게 되었달까. 찰스가 앤디에게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뭐 그런... 하긴 이런 식으로 시작을 따지면 끝도 없겠지.

  배우들 연기는 누가 나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역시 뭔가 꿍꿍이가 있는 비열한 타입에 잘 어울린다. 에단 호크는 다정할 땐 한 없이 다정하지만, 찌질한 모습을 연기할 땐 정말 미친 듯이 잘 어울린다. 엘리트와 루저 사이를 넘나드는 느낌이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전에에서는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을 온 몸으로 드러내 주었다. 마리사 토메이는 비중이 생각보다 크진 않았지만 넘실대는 감정을 잘 보여주더라. 알버트 피니가 대박이었다. 마지막에 앤디를 보며 괜찮단다. It's all right 할 때, 이미 표정이 그렇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얼굴을 막 찡그린 것도 아닌데 그 안에 담긴 분노와 용서못함의 감정이 느껴져서 사뭇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연기자 셋 중에서 가장 도드라졌다는 느낌.
 
  좋았다. 하지만 명작인데 기분나쁘고 재미있는데 찝찝한 기분. 그걸 감출 수는 없는듯.
 
2007/04/16 - 협박하기.


  옛날 포스팅 보다가 급 보고싶어져서 봤다. 포스터에 나오는 사진은 영화 안에 나오는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였던 클라우스 킨스키 사이의 관계가 묻어나오는 사진이다. 짙은 애증. 클라우스 사후에 그를 기억하며 만든 이 영화는, 제목이 너무 적절한 것 같다.

  초반부엔 거의 웃으면서 봤다. 이게 추모 영화인지 코미디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웃겼다. 클라우스의 광적인 면모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설명하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또라이다. 일화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한참 웃었다. 헤어조크 감독은 13살에 얹혀 살던 셋집에서 당시 가난한 연기자였던 클라우스를 처음 보는데, 그 당시의 일화가 사실 가장 재미있었다. 자신의 연극을 보고 '탁월하고 기념비적인' 이라고 평하니, 바로 그 사람의 얼굴에 뜨거운 감자 두 덩이와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던지고는, 식탁에 올라서 "난 탁월하고 특별한게 아니야! 나는 기념비적인 존재야! 획기적인 인물이라고!" 라고 외쳤다니... 48시간동안 욕실 안의 모든 물건을 깨부수며 난동을 부린 적도 있었고, 자신에게 무료로 집을 빌려주고 세탁도 해주던 셋집 주인에게 옷깃이 안다려져 있다는 이유로 "클라라 이 돼지같은 년!"하면서 욕을 쏟아부울 수 있는 존재. 이런 기이함이 어디서 나올 수 있었는지 참 궁금하다.

  촬영 중 일화도 참 많아서, 항상 자신이 주인공이어야 했던 클라우스는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항상 자신에게 주목이 될 수 있도록 발작을 했고... 엑스트라에게 총을 쏘기도 하고, 칼로 내리치기도 하는 기이한 일들도 참 많이 했다. 촬영장에서 그가 난동을 부린 게 한 두번이 아니어서 어떤 때 헤어조크 감독은 그냥 얌전히 관전하기만 했는데.. 어떤 영화를 찍을 때에는 그 영화에 출연한 인디언 엑스트라들의 추장이 찾아와서, "당신을 위해 저 사람을 죽여줄까요?" 라고 묻기도 했다고 한다ㅋㅋㅋㅋㅋㅋ... 그 인디언들이 무서워 한건 클라우스가 아니라 헤어조크 감독이었는데, 클라우스가 그렇게 날뛰는데도 불구하고 헤어조크 감독은 항상 얌전히 상황을 관전해서... 였다고.

  제일 유명한 일화가 일전에도 썼던, "촬영할래, 죽을래" 인데, 헤어조크 본인의 말로 봐서는 내가 들은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짐싸려는 클라우스에게 손에 무기도 없이 가서 얌전히 말했단다. "지금 여기 총이 있는 건 아닌데, 다음 굽이를 돌아가기 전에 총알 8발로 당신을 쏘고 마지막 9발째로 날 쏠거야." ...아 참 얌전하셨던듯..ㅜㅜ 그래놓고 언론에는 자기가 카메라에 총을 달고 촬영했다고 소문이 나서 억울하다는 말도 했다ㅋㅋㅋㅋㅋ 둘 다.. 성격이 만만치 않다.

  영화 중간에 당연히 클라우스가 연기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참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로 연기를 잘 하는 연기자라고 생각했다. '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아귀레는 그냥 클라우스 그 자체인 것 같았다. 다른 영화들에서도 기묘할 정도로 그 히스테릭하고 공격적인 면모가 잘 어울리게 연기하더라.

  클라우스 킨스키는 뭐랄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괴팍한 어린이 같았다. '많은 부분이 허구였던' 그의 자서전에 헤어조크 감독에 관한 욕을 잔뜩 써놓고도, 그 다음 장에는 강박적일 정도로 헤어조크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는 거... 그래놓고 헤어조크 감독에게 말하길 "내가 나쁜 이야기를 안 써놓으면 아무도 이 책을 안 사볼거야. 버러지같은 인간들은 나쁜 얘기에만 신경쓴다구." 라고 말했다니... 뭐랄까 귀여웠음. 항상 주목받고 싶어하는 면모같은거, 특별해지길 원하는 것... 헤어조크 감독의 말처럼 비겁함과 용감함이 섞여 있는 배우였다는 말이 적절했다.

  또, '보이체크'에서 여배우만 상을 받고 클라우스는 못받았을 때, 헤어조크가 "당신이 상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걸 우리가 다 알아요. 상은 기껏해야 당신의 가치를 떨어뜨려 싸구려로 만들 거예요. 온갖 미디어들이 당신을 괴롭힐 거라구요." 라고 말해주자, 클라우스는 기분이 좋아져서 헤어조크에게 키스하고 오랜 시간동안 그를 안아줬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클라우스가 너무 귀여워서 한참 웃었다.

  영화에 나온 여배우들은 클라우스를 다 좋게 평가 해 주는게 재미있었다. 평소에 괴팍하기 짝이 없는 이기주의자임에도 여배우들에겐 상당히 친절했던 것 같다. 심지어 '부끄러움을 타는' 배우였다고 말하는 부분도 있었다. 아 결벽증도 조금 있었던 것 같은데, 알콜로 소독을 한다던가... 짐승과 촬영을 해야 하는 장면에서 기가막히게 싫어한다던가 하는 것들. 이모 저모 독특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고, 클라우스 킨스키의 연기열정을 알 수 있는 장면도 많았다. 헤어조크가 말하길 자신과 킨스키의 마지막 영화 '코브라 베르데'의 결말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발산해서... 작열하듯 타올라서 그 후에 그가 재가 된 것 같았다고. 그가 없었다고. 이 때 클라우스가 "우리는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없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클라우스는 그 뒤 자신이 감독한 영화 '파가니니'를 찍고 자신의 집에서 죽었다.

  마지막 부분 클라우스를 추억하는 헤어조크 감독의 나레이션들에서 참 많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가끔 나는 한 번만 더 그를 내 팔로 안아보고 싶다. 하지만 이런 걸 꿈꾸는 이유는 내가 우리가 옛날에 찍은 필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마치 늘 그래왔던 것처럼 친구인 척 하고 장난을 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린 서로에게 속해 있었다. 우리는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글로 돌아가 함께 보트를 타고 있는 우리를 본다. 세상이 전부 우리 것이었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거기서 날아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 때 그의 영혼이 훨훨 날아다니고 싶어했다는 걸 믿어야 했을까?
  그리고 나는 그가 정말 부드럽고 가벼운 나비 한 마리와 같이 있는 걸 본다. 그 조그만 존재는 그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친한 것처럼 군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클라우스는 스스로 나비가 된다. 그리고 우리 사이의 심각했던 모든 일들이 부드러워 진다. 모든 일들이 잘 되어 간다. 나의 이성은 거기에 거스르지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장 사랑스러운 그의 모습을 내 기억 속에 간직하고 싶다.

  마지막 장면에선 정말로 나비와 함께 있는 클라우스 킨스키의 모습이 나온다. 그 때 그의 모습은 아주 평화로워서, 정말 잠깐이나마 그가 평화롭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줬다. 여운도 길게 남았고...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나의 친애하는 적.


귀여운 여인
감독 게리 마샬 (1990 / 미국)
출연 리처드 기어, 줄리아 로버츠, 랠프 벨러미, 제이슨 알렉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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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부터 보고싶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케이블에서 하길래 봤다. 앞 부분을 조금 놓친 거 같은데, 뭐 상관 없을 듯. 그래도 중요한 부분부터는 다 봤으니까...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는 되게 뻔하게 흘러갈 수 있고, 보통은 플롯 자체가 다 뻔한 편이지만 이건 되게 재미있었다. 20년 전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한 장면도 놓칠 수 없게 만들더라. 물론 플롯이 엄청나게 대단하다 이런 건 아닌데, 창녀인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의 캐릭터가 굉장히 매력있었다. 백만장자-_-ㅋㅋ인 에드워드(리차드)에 비해서 훨씬 보는 맛도 있었고, 여자들이 흔히 꿈꾸는 신데렐라 로망을 제법 잘 투영한 영화. 뭐 신데렐라 스토리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서도 이건 그냥 재미 있었다.

  뭐 크게 엄청 장애가 되는 사건같은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찌나 영화에 집중하게 만들던지. 기껏해야 나쁜 변호사 필립(제이슨 알렉산더) 정도가 방해가 되었을 뿐인데... 이도 뭐 방해나 장애물이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삼각관계로 엮이는 정도도 아니었으니까. 

  비비안을 만나면서 에드워드가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아가는 부분이 재미있었다. 비비안 자체의 성격 변화는 그다지 모르겠다. 비비안은 원래도 밝고 명랑했고, 창녀였지만 곧고 정직한 여자였다. 애당초 그 점에 에드워드가 끌렸듯이. 비비안이랑 에드워드가 하는 대화 중에, 비비안이 처음 킷(로라 산 지아코모)을 만나고... 몸을 팔고 나서 방에서 하루종일 울었다는 소리가 있다. 괜히 그 부분에서 맘이 찡했던 기억이 난다. 근데 뭐 에드워드도 생각처럼 쿨냉정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은 아니었긴 하네. 모즈씨(랄프 벨러미)의 회사를 인수하면서 슬쩍 훈훈해진 정도지, 커다란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 낸 건 아닌 거 같다.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니 뭐니 해도 이보세요 그정도 나이 먹었으면 그 정도 상처는 떨궈내요 싶었고...

  아예 대놓고 비비안이 동화처럼 해피엔딩이 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신데렐라 스토리긴 한데 그 묘사가 너무 즐거웠다. 고급 옷가게에서 옷을 사지 못해서 창피를 당했던 비비안이, 에드워드의 도움으로 그 옷가게에 쇼핑 가방을 가득 들고 가서 "큰 실수 했어요." 하는 장면이라던가. (도대체가 명품을 팔면 자기가 명품인 지 착각하는 족속들이 있다.) 호텔지배인인 바니(헥터 엘리존도)의 도움으로 정말 아름답고 고귀해 보이는 모습으로 변모하는 비비안의 모습들이 보기에 즐거웠다. 그게 꿈인지 알아도 말이다.

  에드워드가 떠나야한다고, 아파트를 마련해 주겠다고 할 때 비비안이 거절하는 부분은 흥미로웠음. 뭐 실제라면 전혀 그렇지 않았겠지만... 이 캐릭터의 매력을 유지시켜 주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한 부분이었다. 마지막 장면에 비비안!을 외치며 차를 타고 오는 에드워드라던가, 고소공포증이 있는 에드워드가 비비안에게 가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부분 같은 건 좀 웃겼지만ㅋㅋㅋㅋ 그래도 결론적으론 알차고 재미있게 본 영화였다.


겁나는 여친의 완벽한 비밀
감독 이반 라이트만 (2006 / 미국)
출연 우마 서먼, 루크 윌슨, 안나 패리스, 레인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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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개봉 당시에 예고편을 보고 뿜었었다. 여성 히어로가 신선하다고 생각했고, 예고편만 봐서는 꽤 재밌어 보여서 보고싶어 했었다. 그러다가 못보고 넘어갔던 기억이 났는데... 요새 케이블에서 많이 해주더라. 아무튼 그래서 또 뒹굴면서 봤다. 조금 기대도 했었으니까... 

  엄청 실망. 스토리가 이렇게 산으로 갈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무슨 생각으로 이 스토릴 영화로 만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초반부는 나름 재미있게 봤는데, 중반 이후부터는 진짜 겉잡을 수 없이 틀어지더라. 만약 영화관에서 봤다면 화가 많이 났을 듯. 

  슈퍼우먼이라는 설정을 저렇게밖에 활용하지 못하겠나? 제니(우마 서먼)가 G걸이라는 게 짜증날 정도로 만들어 버리면 어떡하나... 차라리 영웅짓을 하느라 실제 연애에 서투른 여자였다면 훨씬 귀여운 설정이었겠다. 이건 그냥 짜증나는 여자 그 자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제니보다 악역이라는 베드램 교수(에디 이자드)에게 마음이 더 가면 어떡하나요? 우리 불쌍한 베리ㅜ.ㅜ 이생각만 했다. 맷(루크 윌슨)은 주인공인 주제에 얼간이일 뿐이고, 진짜 맷의 친구인 본(레인 윌슨)이 차라리 제 마음에 솔직하게 굴더라. 맷은 너무 멍청했습니다. 좀 정상인가 싶었던 한나(안나 패리스)도 막판에가선 한없이 안드로메다로.

  으윽. 내게는 시간 낭비였다. 캐릭터를 제대로 활용 못했으면 스토리라도 어떻게 해주시던가.


과속스캔들
감독 강형철 (2008 / 한국)
출연 차태현, 박보영, 왕석현, 황우슬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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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 3주가 다 되어가는데 어떻게 포스팅을 또 하는구나. 그냥 넘길 줄 알았는데... 아무튼 꽤 뒤늦게 봤다. 처음 광고를 봤을 때에는 또 이런 영화인가? 싶었었다. 차태현 또 이런 영화 찍나...? 이런 느낌. 연기 잘하구 스펙트럼이 되게 넓은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너무 비슷비슷한 역할만 하다 보니까 좀 이미지가 고정되어가서 슬펐었다. 그런데 또 요런 영화야? 이런 느낌이었다구.

  그런데 이 영화가 요상하게 입소문을 잘 타는거다. 쫄딱 망할 줄 알았거늘,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고. 뭐 요렇다는 식이었다. 사실 이런 영화가 재미있고 감동도 있어야지 없으면 어떡하니?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말한다면, 진행이 잘 되었겠구나. 뻔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 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호의적인 기분이 되었다. 그래도 영화관까지 보러 갈 생각은 별로 안했는데, 듣는 강좌에서 강사님이 표를 싸게 해주셔서-_-ㅎㅎ 보러갔다.

  그래서 봤는데, 오 재미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뻔한 플롯이야 각오하고 들어간 거고, 그런 스토리에 대해선 큰 불만이 없었다. 진행시켜가는 방식이 중요한거지. 라따뚜이 때 같은 느낌이었다. 전형적인걸 어떻게 지루하지 않게 풀어내는가가 중요한 것 같음... 라따뚜이보다는 조금 더 뻔한 감이 있었지만, 뭐 그래도 쉴 새 없이 터지게 해줘서 재밌었다.
 
  차태현이야 항상 안정감 있었는데 남현수라는 배역 까지 너무 잘 어울려서. 쩝. 미혼모 역할의 황정남(박보영)은 자칫 까다로울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좀 더 무디면서도 어떤 부분에선 섬세한 역할이었다. 손주 황기동(왕석현)은 아이구 그냥 막 귀여웠어요. 사위(..)인 상윤(임지규)은 너무 찌질해서 할 말이 없어... 보는 내내 찌질해만 연발했다. 임지규씨 이럴 때 보면 참 연기 잘하는 것 같아. 유치원 선생님(황우슬혜)은 뭐 생각보다 쿨한 여자네. 요 정도 느낌이었고, 황우슬혜씨는 예뻤다. 연예부 기자 봉필중(임승대)은 이 평탄한 영화에 그나마 하나 사건 터트릴만한 요소 때문에 나온 거였다고 생각하고... 임승대 씨는 참 순한 역할도 잘 어울리고, 이런 나쁜놈 역할에도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전에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빙의 걸린 연기 보면서 놀랐던 기억이 잠깐 나는구나;

  요는 많은 기대 없이 보면 꽤 재미있는 영화라는 거. 즐거웠다. 영화에 비해 홍보가 참 거지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알렉산더
감독 올리버 스톤 (2004 /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출연 콜린 패럴, 안젤리나 졸리, 발 킬머, 안소니 홉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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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 얼마만에 쓰는건지; 아무튼 방에서 뒹굴뒹굴 하다가 보게 되었는데... 나 콜린 파렐이랑 자레드 레토, 안젤리나 졸리 외의 캐스팅은 잘 몰랐는데 의외로 아는 얼굴들이 좀 나와서 반가웠다. 특히 카산데르 역의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_-;; 나오는 줄 몰랐어.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좋아해서 반가웠음. 로자리오 도슨도. 이 여자 너무 섹시하다. 주연 배우들도 꽤 좋아하는 편이고(자레드 레토 킹왕짱 ㅎㅇㅎㅇ) 뭐 적당히 재미도 있을 것 같았다.

  ―만, 아놔 어떻게 이 좋은 배우들을 데려다가 이렇게 찍어 놓을 수 있어(...) 지루해서 채널 몇번이나 돌릴 뻔 했잖아! 내용이 쉴틈없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늘어지는 부분이 많았다. 이야기 자체 각색이 진짜 멋대가리 없게 됐다고 생각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라는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없게 만들기도 힘들텐데. 전쟁씬이 매력있거나, 드라마적 매력이 있어야 했을 텐데 둘 중 어느 것도 끌어당기는 것이 없었다. 무의미해보이는 영상들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좀 편집을 더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더 들었다. 3시간 동안 지루하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했다.

  주변 인물들도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아니어서 몇번정도 헤맸다. 캐릭터가 좀 덜잡혔다고 해야하나... 무엇보다 알렉산더(콜린 파렐)캐릭터 자체를 매력없게 찍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인 올림피아스(안젤리나 졸리)나 아버지 필립(발 킬머)와의 관계에서부터 삐꺽거렸으니, 알렉산더 측근들과의 관계는 뭐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좀 안정적인 게 헤파이스티온(자레드 레토)과의 관계였다. 전쟁 이야기보다 헤파이스티온, 록산느(로자리오 도슨)와의 연애사가 더 눈에 들어왔으니 이걸 누구 탓이라고 해야 할지; 이걸 좀더 치밀하게 찍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늙은 프톨레미(안소니 홉킨스)의 나레이션으로 끝이 나는데... 과거 회상 뭐 좋다만. 이때쯤 됐을 땐 그냥 지겹다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록산느의 등장 정도. 춤이 너무 예뻐서 그냥 넋놓고 봤다. 그리고 헤파이스티온 죽을 때의 콜린 파렐 연기 부분. 슬픔이 절절하게 느껴지더라. 평소 자레드 레토와 콜린 파렐의 캐릭터를 생각하면 조금 우습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런 캐스팅과 이런 소재로 이렇게 지루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많이 아쉽다.

렛 미 인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 스웨덴)
출연 카레 헤데브란트, 리나 레안데르손, 페르 라그나르, 헨릭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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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다 본다 하다가 이제사 다 봤다. 뱀파이어 물인지도 모르고 봤다가, 초반을 조금 본 후에서야 알았다. 최근 뱀파이어물을 보고 싶어서 난리치던 차에 더 잘됐다 싶었다. 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스웨덴 영화다. 배경은 눈덮인 설원만이 기억에 남는, 특별하게 화려하진 않은 영화였다. 그래도 인상적이게 잔혹한 장면이 꽤 있고 조용함 속에서 그런 모습들이 더욱 부각됐다. 영화의 조용하면서도 뭔가 스산하게 스려있는 듯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쨍한 눈밭은 되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느낌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뱀파이어 공포 영화라기 보다는 소년과 소녀가 만나서 성장하는 이야기 쪽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 같다. 잔혹한 장면이 없지는 않은데, 주인공들이 만나서 서로 교감하고 서로를 아끼게 되는 과정들이 아주 좋았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해 주변에 아무도 없는 오스카르(카레 헤레브란트)와, 지켜주는 보호자 호칸(페르 라그나르)가 죽은 후의 12살(혹은 그보다 더, 덜한)짜리 뱀파이어 엘리(리나 레안데르손). 서로를 의지하며 자라나는 이 소년소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모스 부호 같은 것을 통해 대화하던 것, 큐브를 통해 마음을 나누기 시작하던 것... 수영장에서 오스카르의 손을 잡으며 끌어내던 엘리의 표정이 가장 좋았다.

  가장 인상적이던 장면은 엘리가 뱀파이어인 것을 알게 된 오스카르가 조금 냉정하게 구는 부분이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는 엘리에게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던 오스카르. 그에게 "초대해 달라."고 말하던 엘리. 강아지를 들이듯 손짓으로 엘리를 들여놓았을 때, 엘리는 그 분노를 속으로 참아내듯 온 몸에서 피를 쏟아냈다. 뱀파이어의 '초대' 방식에서 기인한 결과였지만, 나는 그 상태에서도 엘리가 오스카르를 죽일 수도 있었고 생각한다. 엘리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오스카르를 그만큼 아꼈기 때문이 아닐까. 배신감 또한 컸던 것을 것 같다. 다행히 그 뒤로 둘은 잘 풀렸지만.

  영화에서 살인은 무차별적이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딱히 선악에 따라 판단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짐승의 본능처럼 엘리는 사냥을 하고, 엘리의 보호자 또한 그랬다. 엘리는 오스카르에게 "당한만큼, 당한 것보다 더하게 갚아줘라."라고 가르쳤다. 이건 완전히 자연계 법칙이고, 엘리의 삶은 완전히 그 규칙 안에서 굴러가는 것 같다. 엘리의 살인에는 어떠한 가치 판단도 들어있지 않다. 오스카르를 괴롭히던 패거리를 죽일 때 빼고는 엘리의 살인에 어떤 법칙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살기 위해 살인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은 오스카르도 엘리와 비슷하기 짝이 없어서, 엘리 말대로 오스카르 또한 "죽일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살해했을 것" 같다.

  시놉시스 소개에는 호칸이 엘리의 아버지처럼 소개되어 있던데, 원작에서는 다르다. 엘리의 연인같은 존재라고 해야하나. 하지만 엘리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어쨌건 영화에서도 그다지 아버지 같은 구석은 없었고... 어쩌면 오스카르가 커서 호칸 같은 존재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음 아니겠찌.

  마음에 들었다. 조용한 마을에서 큰 소동이 조용한 것처럼 일어난다.


버터플라이
감독 필립 뮬 (2002 / 프랑스)
출연 미셸 세로, 클레어 부아닉, 나드 디유, 자케 보아니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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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드 블로그에서 하는 시사회에 당첨되어서 갔다 왔다. 명동에 있는 스폰지하우스에서 봤는데, 생각보다 관이 작았다. 특별히 불편했던건 아니고 그냥 아담하니 좋았다. 은자랑 같이 봤는데 나보다 은자가 더 마음에 들어한 것 같다.

  프랑스 영화에 대한 작은 편견이 있었다.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봤던 프랑스 영화들은 모조리 지루했고, 특히 난 그 발음을 견딜 수 없었다. 프랑스어 발음은 날 졸리게 만들었고, 프랑스 영화를 볼 때면 난 어김없이 잤었는데... 이 영화는 좀 다르더라. 쉴새 없이 쫑알대는 엘자(클레어 부아닉)를 보고 있으면 영화에서 눈을 뗄 새가 없었다.

  엘자 캐릭터는 처음엔 좀 별로였다. 어린애가 너무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또 생각해보니 그게 어린애긴 하더라.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가출을 감행하는 시도 자체는 귀여웠다. 줄리앙은 그냥 나비를 수집하는 평범한 노인. 심술궂은 척 하지만 사실 엘자를 많이 걱정하고, 아끼고 보살펴주는 모습들이 보여 좋았다. 그리고 엘자에게 많이 약했다. 유괴소동을 불러올만큼 허술했던 건, 줄리앙 자신도 많이 외로웠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역시 며칠이 다 되도록 전화 한 통 제대로 못한 건 문제가 있긴 하다. 엘자 엄마는 지나치게 책임감이 없었다. 별로 비중있다고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냥.

  잔잔할 때도 있지만, 마냥 조용한 영화는 아니었다. 그냥 단순한 여행담이라기엔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건도 있고, 엘자와 줄리앙의 담화의 덕도 크다.

  엘자와 줄리앙(미셸 세로)의 담화들은 가볍고 쉼 없이 이어지지만, 때때로 철학적이다. 우리 삶 속에 있는 단순한 물음들은 엘자를 통해 던져지고, 줄리앙의 입을 통해 어린이의 시선에 맞게 설명된다. 줄리앙이 엘자에게 하는 설명들은 노인의 입에서 나올 법한, 경험에 입각한 사실들이 많아서 좋았다.

사랑을 증명하라고 하는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야. 믿음이 없다면 사랑도 없어.
하지만 그 새는 날아가지 않았어. 나는 그게 너무 기뻤어. 왜게? 내 곁에 계속 남아 있다는 것은 날 사랑하기 때문일꺼니까.

  이거 말고도 사람이 순간을 위해 아둥바둥 살아간다는 것, 죽음은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사실 난 이게 가장 좋았는데 대사가 잘 기억 안난다.) 이런 심각한 이야기들이, 엘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의 말들로 전해지는데 그것들이 참 좋았다. 줄리앙이 엘자에게 그림자를 통해 해주던 이야기는 단순한 동화라기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엔딩 크레딧에서는 두 배우가 함께 부른 '나비Le Papillon'가 엔딩곡으로 쓰이는데, 그 가사를 보면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담화의 수준과 그 안의 철학을 알 수 있다.

  좋았다. 커다란 난관이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없더라도 충분히 즐겁고 재미있는 영화였다. 우리나라에선 뒤늦게 개봉한 셈인데, 그렇다고 해도 어색한 건 전혀 없었다. 뭐 특별히 도시풍경이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이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진행되었으니까.

  두 배우가 함께 부른 뮤직비디오와 가사를 첨부한다. 스튜디오 모습을 보니까 또 신기한 기분이다.

  검색해보다가 충격받았다. 줄리앙 역을 한 미셸 세로가 2007년에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다시 한번 죽음은 갑자기 찾아온다고 했던 영화 속 대사가 떠오른다. 좋은 데 가셨길...
 
 

 

  누가 줘서 봤다. 요새 영화 잘 안봤는데 딱 맘잡고 봐야지... 하고 침대에 누우니 28분짜리 단편영화였다. 스웨덴 영화라서 말 하는건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자막이 있어도 귀에 익은 언어를 듣는 것과 안그런 언어를 듣는 것은 느낌이 사뭇 다르다.

  퀴어영화이긴 한데 되게 담백하고 마음에 들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느낌의 영화다. 스웨덴 산 한가운데에 있는 캠프장은 조용하기 짝이 없다. 그 안에 아빠와 같이 사는 올레(토비아스 뱅츠손)의 성격도, 자신이 사는 곳과 꼭 걸맞게 얌전하다. 전구를 엮어 무대 장식이나 만들며 아빠와 조용히 캠프를 꾸려나갈 뿐이다. 여행을 다니며 캠프에 해년마다 찾아오는 바브로 아주머니(브리타 앤더손)는 이번엔 조카인 케빈(톰 로프터주드)과 함께 캠프를 방문한다. 올레와 케빈은 미묘한 감정을 대하고, 약은 듯 하지만 자기 감정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으려 하는 케빈과, 수줍고 어색하지만 자기 감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 올레의 줄다리기가 재미있다. 내가 왜 요약을 하고 앉아있냐... 아무튼 제목인 럭키 블루는 케빈(과 바브로 아주머니)이 키우는 새 이름. 새장속에 갖혀 있는 것을 올레가 꺼내서 같이 놀다가 날려보낸다. 하지만 뒤에 되돌아 옴. 이걸로 뭔가 사랑의 상징을 주려고 했던 듯.

  올레 캐릭터는 되게 수줍고 내성적이지만, 은근히 다부진 면이 있어서 좋았다. 올레가 무대에 올라가서 F. R. David의 Words를 부르는 게 되게 좋았다. 내성적인 올레이지만 자기 감정에 있어서는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배우도 케빈 역 배우에 비해 좀 더 섬세해 보였다. 케빈은 솔직히 처음엔 좀 얄미웠다. 자기가 먼저 꼬셔놓고 딱 모르는 척 하는 건 우습다. 사실 그 마음도 이해는 가는데, 그 이후에도 또 찔러보는 건 뭐니 이 녀석아. 자신만만한 척 하지만 사실 올레보다도 용기 없었고 약은 척만 하는 애였다. 그래도 막판 가서는 가까스로 자기 감정 인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냥 가볍고, 조용하고, 물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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