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구병모 (자음과모음,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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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누가 빌려줘서 읽기 시작. 제목이 끌려서 읽고 싶었었는데 오, 읽고 나니 더 좋았다. 목덜미에 아가미(와 몸에는 빛나는 비늘을)를 가지고 있는 남자 곤에 관한 이야기. 곤을 찾아온 여자 해류가 들려주는 회상과 현실이 얽혀있는데 이 과거를 되짚어나가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곤의 과거는 어찌 보면 슬플 수도 있지만 막상 본인은 담담하게 자라난 느낌. 아버지가 곤(그때는 곤이 아니었지만)과 함께 이내촌의 호수에 투신자살을 하고, 아버지는 죽었지만 곤은 이내촌에 사는 노인에게 거두어진다. 노인은 손자인 강하와 함께 살고 있고, 딸은 젊을 때 집을 나가 강하만을 맡기고 또 연락이 끊긴지 오래인 상황.

  처음에는 곤을 보내버리라던 강하는 곤의 목덜미에 있는 아가미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이제는 오히려 노인에게 신고하지 말라며 곤을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하는데, 그렇다고 강하를 다정다감한 형제로 보긴 어렵고 곤을 대하는 행동이 좀 난폭하기도 하다. 근데도 이게 밉지가 않은게, 애가 삐뚤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감정표현에 서툴고 어려서 그런 느낌이라서 강하도 이해가 갔다. 곤의 비밀을 세상에 들키지 않도록 노력하는 강하의 모습은 신기하다. 이렇게 저렇게 곤을 구박하면서도 결국 곤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곤이 호수에 빠진 아이를 구해냈을 때 강하는 그를 칭찬하기보다는 오히려 (심하게) 혼을 내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한다. 아이의 목숨보다도 곤이 중요하다는 듯이. 밖에서 보면 강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만 곤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곤에게 강하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비밀을 지키라고 말하는 감시자 같다. 곤이 그걸 상처로 여긴다기 보다는 좀 덤덤하게 아 그렇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는 거 같긴 하지만.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 강하의 엄마 이녕의 귀환은 무덤덤히 살아갈 수 있었던 상황의 반전을 만들어낸다. 연기자가 꿈이었지만 그 꿈을 잃고 나이 든 퇴물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녕에겐 더 이상의 꿈이 없다. 그녀는 하루하루 환상을 만들어주는 약을 먹으며 남은 인생을 소진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는 것은 곤 뿐이다. 본디 무덤덤하고 또한 세상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한 곤은 그런 이녕을 바라만 보는데, 어느 날 약에 취한 이녕은 몸을 씻던 곤을 우연히 보게 되고, 그런 곤에게 "예쁘다"고 말한다. 여태까지 자신의 몸을 감추고 숨겨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곤은 그 말 한마디에 감화되어 이녕을 진짜로 신경쓰게 된다. 이런 깨달음의 과정이 좀 신기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 이후 곤은 이녕을 진짜로 신경쓰게 되어 그녀가 먹는 약들을 한번에 다 버리게 되는데, 약물중독자들이 그러하듯 이녕은 금단증상과 환각에 시달려 곤을 살해하려 들고, 역으로 방어하던 곤에 의해 죽는다. 당황한 곤은 그대로 강하를 부르는데 신기한 게 강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곤을 여태까지처럼 폭력적으로 다루지 않고, 오히려 당황하나 곤에게 후드티를 입히고 있는 돈을 챙겨주어 멀리 떠나 보낸다. 이곳은 자신이 처리하겠다며. 이 때 곤은 강하에게 "날 죽이고 싶지 않느냐"고 묻고 강하의 대답은 이렇다. "물론 죽이고 싶지"만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여태까지 자신이 들었던 말 중에 "예쁘다"가 가장 최고의 찬사인 줄 알았던 곤은 강하의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존재 자체에 대한 소중함을 획득한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야만 한다. 강하의 "돌아오지 말라"는 말을 듣고. 그래서 일년에 한 번씩 자신이 머무는 곳의 풍경을 사진으로 보내며.

  소설은 아가미가 있는 곤에게서 시작하지만 이야기 전체는 곤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곤과 강하의 관계에 더 물들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겉으로는 삐뚤어졌지만 속으로는 이상할 정도로 끈끈히 맺힌 관계. 곤의 몸상태보다는 곤의 내면이 더 궁금하고, 강하와 곤 사이에 남아있는 것들이 더 보고 싶은 그런 이야기였다. 그런 관계 면에서는 은교가 생각나기도 했다. 지누도 그 생각을 한 거 보면 나만 한 생각이 아닌듯ㅎㅎ

  어쨌든 난 즐겁게 봤다. 재미있었음. 곤이 강하를 어서 찾아내기를.

  곤, 당신 이름 있잖아요. 그거 할아버지도 아니고 강하가 지어준 거래요. 그렇게 부르기도 기억하기도 쉬운 단 한 글자뿐인 이름을, 막상 자기가 붙여놓고 부르지도 못했대요.
  그 무렵 강하는 『장자』를 어린이용 다이제스트 판으로 엮은 학급문고 도서를 읽고 있었대요. 장자의 첫 장에는 이런 얘기가 있거든요. 북쪽 바다에 사는 커다란 물고기, 그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강하는 당신의 아가미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으로서 이거야말로 이 아이한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대요. 하지만 그래 놓고는 당신의 이름을 부른 적이 거의 없었죠. 그건 그 다음 장에 있던 한 줄이 일종의 예언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래요. 이 물고기는 남쪽 바다로 가기 위해 변신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고 한다. 그의 등은 태산과도 같이 넓고 날개는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과 같으며 한번 박차고 날아오르면 구만 리를 날아간다고요.
  언제 어떤 일로 떠날지 모르는 아이였잖아요. 오랜 기간 이내촌에 머물긴 했지만 실제로 당신은 불의의 사고로 떠나왔고요. 강하는 그 이름을 일상적으로 부르는 것조차 두려웠던 거예요. 한 번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존재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한 글자가 혈관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마침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아가미』, 구병모, 자음과 모음, 2011, pp. 180-181
연인
카테고리 소설 > 프랑스소설
지은이 마르그리트 뒤라스 (민음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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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류가 빌려줘서 읽기 시작. 빌려 읽긴 했는데 다 읽고나서 그러고보니 우리 집에 이런 이름의 책이 있었던 거 같은데... 하고 고개를 돌리니 책장에 이 책이 보였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야 이건ㅋㅋㅋㅋㅋㅋㅋㅋ 산호출판사에서 나온 92년도 판 책이긴 한데 더 두껍고(단편 두 개가 더 들어있다) 워낙 옛날 책이라서 기억도 못하고 있었네. 분명 할아버지 댁에서 가져온 것이겠지...

  따라서 연인 본편은 민음사 판을 읽었고, 나머지 단편 두 편(작은 공원, 부영사)은 산호출판사 버전으로 읽었다...만 사실 연인 말고 나머지 두 편은 안읽은 것이나 마찬가지. 눈은 읽고 있는데 머릿속에 남은 게 하나도 없다. 와, 내가 왜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에 연인 하나만 있는 지 알 거 같았음. 연인이 그나마 읽을 만 하니까요... 사실 연인 자체도 시점이나 시제가 왔다갔다 하는지라 읽으면서 좀 내 글은 아니다 싶었는데(오 난 이렇게 현재 과거, 혹은 주체가 왔다갔다 하는 데 약한 듯) 나머지 두 개는 더 못읽겠더라. 부영사는 초반에만 집중하다가 결국 나가떨어짐. 안 읽어.

  연인 자체도 읽기 쉬운 글은 아니고, 시종일관 불행에 젖은 삶에 무감각해진 열일곱의 '나'를 보고 있다면 읽는 나까지도 무심한 표정을 짓게 되었지만... 그래도 내용은 괜찮았다. 아버지가 죽고, 히스테릭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방관 아래 엉망으로 자라난 폭군 첫째 오빠, 큰오빠에게 눌려 다소 약해진 둘째오빠와 살고 있는 열일곱 소녀 '나'가 주인공. 특이하게도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은 프랑스가 아니고 베트남이다. 동양의 바탕에 있는 서양인의 모습은 지금 상상해도 꽤 부자연스러운데, 시대상을 생각하면 어땠을 지 보지 못했어도 감각으로 느껴진다.

  소설은 이런 '나'가 부유한 연상의 중국인을 만나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뭐 그런 일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사실 '나'쪽에서는 그다지 열렬한 반응도 아니었고("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어요. 날 사랑한다 해도, 당신이 습관적으로 다른 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대해 주세요.") 세상을 무심하게 보는 그런 시선과 서술법 탓에 달콤하다기보다는 힘든 사랑이라는 느낌이 더해졌다. 실제로도 그랬고. 중국인 남자는 나의 시선 안에서도 심약하고 나약하다.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나는 중국인이야." 하는 대사에서 느껴지듯 가족, 특히 아버지와 관련된 일과 그녀의 젊음 앞에 힘들어한다. 이 둘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났다는 것이 전제로 되어있어 더 애틋하게 읽힌다. 감정이 결핍된 프랑스인 소녀와 나약한 중국인 남자의 사랑 시간이 지날수록 더 메마르고 또 더 진한 인상을 남긴다. 전반부에는 이게 사랑인가 싶었던 부분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억눌린 채로 스멀스멀 번져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코 폭발하지는 못한다. 그와 그녀의 이별 장면은 별다른 구구절절한 하소연과 애원 없이도 가슴이 시리다.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뒤 걸려온 한 통의 전화까지 참 스산하게, 스치듯이 그러나 깊게 마음이 아프다.

  소설에서 중요한 건 남자와의 사랑 뿐 아니라 가족간의 관계였는데, 어머니-큰오빠로 이어지는 강한 압제의 주체들은 읽기만 해도 진저리처지는 모습을 담고 있다. '나'의 서술처럼 어머니는 진짜 미친 것일수도 있고, 큰오빠는 그런 어머니 아래에서 왕으로 키워진 또 하나의 미친 사람 같았다. 작은 오빠는 그냥 안쓰러웠고. 이런 가족을 바탕으로 담고 있는 '나'의 심리 또한 이해할 만한 사춘기의 것이어서 그건 좋았다. 그 허무함 때문인가 약간 롤리타 읽는 기분도 들었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인 내용이 담긴 소설이라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가늠이 잘 안된다. 다만 배경이 너무 특이해서 아 여기 가봤겠구나 하는 생각은 했었다. 중국인과의 사랑은 모르겠고. 다만 첫째 아이를 잃은 것, 가족사항 뭐 이런거 다 비슷하니까 연인과의 일도 사실일 거 같다. 여튼 괜찮게 읽었다. 확 취향이냐면 그건 아니고.

첫사랑
카테고리 소설 > 소설문고/시리즈 > 소설문고일반
지은이 투르게네프 (웅진씽크빅,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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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첫사랑의 미묘한 감정을 잘 담아낸 이야기라고 해서 보고 싶어서 샀다. 책이 얇아서 보기 편할 거라 생각한 것도 있었고... 그리고 진짜 괜찮았다. 러시아 소설은 그 이름 때문에 읽기 전에도 지레 겁먹는 편인데 이 소설은 주요 등장인물이 단순한데다가(지나이다의 구혼자들이 많긴 하다만 뭐 굳이 이름을 외우려 하진 않았고 성격에서 판명나니까) 부칭을 담는 러시아의 이름 짓는 양식을 이용한 구석이 약간 있기도 해서 마음에 들었다.

  (만) 열여섯이 되어 대학교 입학 시험 준비를 하는 소년과 청년 사이의 남자,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가 그 주인공. 그의 집에 새로 세를 얻게 살게 된 궁핍하고 몰락한 자세키나 공작부인이 있다. 공작은 이미 세상을 떴고, 공작부인과 함께 하는 것은 그녀의 딸 지나이다. 스무살의 지나이다는 아름다운 외모와 그에 어울리는 영악한 모습으로 여러 구혼자들을 데리고 논다. 블라디미르는 그녀에게 말 그대로 첫눈에 반하게 되는데, 이런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평소엔 좋아하지 않지만 도리어 이 소설에서는 첫사랑의 풋풋함과 무절제함의 느낌을 주어서 더 현실감 있었다. 자신보다 네 살이나 많은 연상의 여자. 게다가 자신을 어린 대상으로만 보는 지나이다의 시선을 블라디미르 또한 느낄 수 있다. 거기서 오는 막막함과 가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애틋함, 간절함이 뒤섞여서, 신기하게도 편하게 읽는 내내 가슴 한 켠에 물이 스미듯 서서히 내 마음을 적시는 감정들의 묘사가 마음에 들다. 어린 청년은 주변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빠삭하게 파악할 만큼 영특하진 않지만 그런 기류는 느낄 수 있었기에 그런 답답함 속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잡을 수 없는 심정이 절절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소설에선 블라디미르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가 꽤 흥미롭게 그려진다. 블라디미르를 아끼긴 하지만 자식에 대한 예의 그 이상의 사랑을 보여주지 않는 아버지의 캐릭터는 화를 돋구면서도 흥미롭다. 이런 캐릭터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나 했더니 이건 투르게네프 작가 본인의 삶에서 기인한 것이라서 더 신기했다. 이 소설은 비현실적이네, 말도 안된다 하는 생각을 들게 하면서도 그것을 믿게 하는 진실성이 있었다. 그런 진실성은 작가의 현실에서 기반한 것이겠지. 사랑이 없는 결혼을 한 아버지, 어머니를 똑 닮은 아들을 사랑할 수 없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는 어머니.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투르게네프에게는 현실이었으니 이런 소설이 나올 법도 하다. 하여간에 내게는 소설 안에서 나오는 아버지에 대한 묘사가 지나이다에 대한 묘사보다 더 흥미로웠다. 뻔히 악한데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를 좋아해서 그런가.

  지나이다에게 진실로 사랑하는 대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살인까지도 불사하려던 청년은 그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모든 것을 접게 된다. 그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야기는 통속극으로 흘렀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이 사랑을 갈구해 마지않는 아버지임을 깨달았을 때 이야기는 바뀐다. 그는 심지어 그런 아버지를 미워할 수도 없다. 감정이 마구마구 부풀어오르는데도 폭발이랄 것이 일어나지 않는 기이함이 여기 있다. 그런데도 그의 감정은 구구절절이 이해할 만 해서 씁쓸하기도 했다.

  음... 편하고 좋았다. 엄청 몰입할 정도는 아니고.

  아버지는 나에게 기이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도 기이했다. 아버지는 내 교육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한 번도 나를 무시한 적은 없었다. 그는 나의 자유를 존중해 주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아버지는 내게 예의 바르게 대했다……. 단지 아버지는 나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뿐이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는 나를 매료시켰으며 나의 이상적인 남성상이었다. 그의 손이 나를 밀쳐내고 있다는 것을 내가 끊임없이 느끼지 않았다면, 아버지에 대한 나의 애착이 얼마나 커졌을 지 알 수 없다. 대신에 원하기만 하면 거의 순식간에, 한마디로 말하면, 몸짓 하나로 아버지는 내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내 영혼은 활짝 열려서, 마치 현명한 친구나 관대한 교사에게 하듯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못 본 체하곤 했다. 아버지의 손이 다시 나를 밀어냈다. 상냥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밀어냈다.
  때로는 그도 유쾌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의 아버지는 장난치며 소란을 피우기도하고, 소년처럼 나와 같이 놀기도 했다. (아버지는 몸으로 하는 힘든 운동은 모두 좋아했다.) 한 번, 딱 한 번! 아버지가 너무 상냥하게 나를 귀여워해서 나는 거의 울 뻔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쾌함과 부드러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 둘 사이에 벌어진 일은 마치 꿈처럼 내게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도 품게 하지 못했다. 나는 이지적이고 밝게 빛나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얼굴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내 심장이 떨려왔고 내 몸 전체가 그에게 빨려들 듯했다……. 아버지는 마치 내 마음속을 읽기라도 하듯, 내 옆을 지나며 내 뺨을 어루만졌다. 집을 나서다가, 일을 하다가, 혹은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갑자기 몸 전체가 굳어지곤 할 때면 바로 내 몸도 움츠러들고 차갑게 식었다. 나를 향한 아버지의 호의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분명 아버지도 알 수 있는 내 애원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갑자기 일어나는 드문 발작과 같았다. 나중에 아버지의 성격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는 나나 가족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으며 그것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선택해라. 타인의 도움을 바라지 마라. 너는 너의 것이란다. 그것이 바로 삶이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계신 곳에서 젊은 민주주의자로서 내가 자유에 대해 논할 기회가 있었다. (내 식으로 부르자면 그날의 아버지는 '선량'했다. 그럴 때는 아버지와 무슨 얘기든 할 수 있었다.)
  "자유." 아버지가 되뇌었다. "무엇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지 알고 있니?"
  "네?"
  "그것은 의지, 자신의 의지란다. 그것은 자유보다 더 좋은 권력을 준단다. 무언가를 원하는 능력을 가져라. 그렇게 되면 자유를 얻고 다른 사람들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반 투르게네프, 『첫사랑』, 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pp. 69~71
오렌지만이과일은아니다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지넷 윈터슨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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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모던 클래식 판본 너무 좋다. 종이가 가벼워서 쓱쓱 잡히고 크기도 적당하고...

  이 책을 왜 샀더라. 암튼 모던클래식에서 나온 책들 보다가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랑 이 책중에 고민하면서 샀던 것 건 기억난다. 세라 워터스의 소설들을 읽은 직후라 레즈비언 문학이 읽고 싶었던 것 같기도... 물론 살 때에도 세라 워터스랑 완전 다를 건 각오했다. 그건 역사소설이자 연애물이었고, 이건 개인의 성장기에 가깝다.

  레즈비언으로서 정체성을 자각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일반 성장 소설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두드러지는 가정사 때문이었다. 입양아인 지넷의 엄마는 기독교 원리주의자. 이 쯤되면 답이 나오는 상황 아닌가. 원리주의자들과 함께 하며 자라난 지넷이 그 틀에 온전히 복종하고 있다가 그것에서 벗어나게 되는 뭐 그런 이야기인데... 내 생각보다는 충격이 좀 없었다. 묘사가 자기 성향에 대해 그렇게 큰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어린 시절 이후의 이야기를 큰 시간라인에 따라 진행시켜서 감정이 썩 잘 드러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성장통보다는 그 성장에 초점을 둔 이야기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고난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설명되는 것들의 중점이 거기 있는거 같지 않았다.

  지넷보다 엄마 캐릭터에 더 집중하게 된다. 아무래도 캐릭터가 엄청나게 강렬하다보니까 어쩔 수 없었다. 보기만해도 소름끼치는 인물상이지만 소설 안에서는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지넷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약간 안타깝기도 했다.

  중간 중간 끼워진 우화 형식의 이야기들은 본래의 이야기와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말할 순 없지만 적당히 연관되어 있다. 따로 읽어봐도 무방하지만 본래 이야기를 생각하며 읽으면 더 재미있음.

  작가의 자전소설에 가깝다. 물론 어느 정도 허구가 섞여 있기야 하겠지만 소설의 주인공 이름도 지넷이고, 똑같이 입양아에다가 기독교 원리주의자 어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소설 후반부에 지넷이 고생했던 이야기는 별로 없이 집에 돌아와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이야기만 있어서 똑같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작가 본인의 환경이 없었다면 완성되지 못했을 소설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책장은 잘 넘어가고, 집안 환경에 관한 부분 때문에 즐겁게 읽긴 했음. 마음에 아주 쏙 들 정도는 아니었고. 이것보다 더 기대를 했었나보다.
로드(THEROAD)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코맥 매카시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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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재미없기로 무섭게 소문이 나있고, 코맥 매카시라는 작가에게 큰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어서 읽을 생각 없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재밌게 보긴 했지만 그건 영화였고. 아포칼립스 배경을 되게 안 좋아하는데 어쩌다 보니 읽고싶어져서 샀다. 글이 되게 강단있고 툭툭 친다는 느낌이었다. 한계가 보이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고난들이, 삶에의 끈질긴 집착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읽을 때 마냥 행복했다던가 그런 이야긴 아니지만.

  책은 밑바탕이 되는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진 않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짚어주진 않지만 현실의 상황이 어떤 지는 소름끼치도록 잘 느껴진다. 자연에서 나오는 음식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버린 세계, 강도들이 날뛰고, 약한 자는 빼앗기고 강간당하며 심지어 먹히기까지 하는 그런 세계 묘사는 이상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는 단순한 자연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것이 놀랍도록 설득력 있었다. 인간 본성이 선하다고 믿는 타입은 아니어서 더 그랬다.

  '남자'와 '소년'은 이런 불확실한 세계 속을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걸어나간다. 끊임없는 그들의 길 속에는 고난이 대부분일 뿐 행복은 그림자만 언듯언듯 보여질 뿐이다. 며칠을 굶기도 하고,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이제 마지막이다, 이제 마지막이다 싶을 때에도 언제나 희망은 있다. 이런 이어짐은 소설의 결말에까지 이어진다. 지치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생명력이 거기에 있다.

  살기 위한 남자와, 아직은 꿈을 꾸고 있는 소년의 부딪침,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만남.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 길은 모두 하나로 통하는 것만 같았다. 희망이 있다는 믿음. 길가에서 만났던 노인은 그런 면에선 희망이 없는데도 살아남은 사람 같았고, 약탈자들은 그 희망보다는 눈 앞에 있는 것들을 쫓고 있는 것 같았고. 기분이 번잡했다.

  소설 초반 쯤에 남자가 소년에게 죽지말라고,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싶어진다고. 그랬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소년이 거기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저와 함께 있고싶어서요? 응. 그래.
백설공주에게죽음을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넬레 노이하우스 (북로드,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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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 생각 전혀 없었는데 차장님이 자기가 보고 빌려주셔서 봄. 사실 이런 식의 소설을 즐겨 보진 않는데... 의외로 재미있게 읽었다. 추리 소설 같은 느낌. 스릴러기도 한데 막상 그렇게 긴박하진 않아서 손에 땀을 쥐고 보거나 그렇진 않았다.

  고교시절 두 명의 여자친구를 살해하 죄로 감옥에 10년동안 복역한 토비아스 자토리우스가 주요인물. 이 소설에서 주인공을 꼽고 싶지가 않은 게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주체가 딱 하나가 있는 게 아니라 여럿이 얼키설키 엉켜서 사건해결이 이뤄지는 거라서 그랬다. 토비아스는 자신이 살해를 저질렀단 기억이 전혀 없이 증거만으로 형을 살게 된다. 토비아스가 죽였다고 추정되는 여자 둘은 토비아스의 전 여친이었던 로라와, 당시 

  알텐하인이라는 작은 도시가 배경. 항상 이런 소도시가 나오면 소름이 끼치는 게, 사람들끼리의 결속력이 대단하고 그 안에 음모가 있는 느낌이라서 그렇다. 마치 이끼처럼. 이 소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 좋은 얼굴로 마을을 쥐고 흔드는 부자 클라우디우스 테를린덴이 있고, 10년 전 교사이기도 했던 남편 그레고어 라우터바흐를 훌륭한 정치인으로 만들어 낸 정신과 의사 다니엘라 라우터바흐, 마을의 심술궂은 소식통 마고트 리히터 등 마을의 인물들은 수상쩍기 짝이 없다.

  토비아스는 알텐하인으로 돌아와서 잔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아버지 하르트무트 자토리우스가 운영하던 식당은 망한 지 오래이고, 테를린덴의 놀음으로 재산을 빼앗기게 된 터라 어머니는 리타 크리머는 아버지를 오래 전 떠났다. 그나마도 토비아스가 돌아오면서 리아 크리머는 누군가에게 차도로 밀쳐져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된다.

  토비아스의 곁에 남은 알텐하인 주민은 어릴적부터 친구였던 나디야 폰 브레도프 뿐. 어릴 적 촌스러운 모습이었던 나디야는 이제 유명한 스타가 되어있고, 토비아스를 끊임없이 돕는다. 마을에서 토비아스를 배척하지 않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건 마을에 새로 들어온 십대 아멜리 프륄리히와 테를린덴의 첫째 아들인 티스 테를린덴. 아멜리는 고스스타일을 즐기는 십대 여자아이로 겁이 없는데, 10년 전 토비아스가 죽였다고 하는 여자 중 하나인 스테파니를 꼭 닮았다. 티스는 심성이 곱지만 뭔가에 억눌려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자폐증을 앓고 있어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티스의 동생인 라르스는 일전에 토비아스의 친구였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마을을 떠나 가족과의 연락을 거의 두절한 상태.

  이런 설정 속에서 형사인 보덴스타인과 피아가 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가 주가 된다. 물론 형사 쪽 인물들이 더 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 둘이라고 보면 될듯. 둘의 개인사정도 나오긴 하는데 추리에 좀 지칠때 쯤 간간히 재미를 더해주는 정도였다.

  하여튼간에 결론은 결국 토비아스의 잘못이 아니었고, 마을 사람들이 긴밀히 얽힌 과거 사건이라는 게 드러남. 이거야 처음 읽을 때부터 짐작이 가능하다. 누가 어떻게 했느냐의 문제... 이것도 뭐 그냥 그랬고 난 음습한 과거 일이라는 데 더 집중해서 재미를 느꼈다. 추리 그런 거 안함.

  로라는 토비아스의 친구들인 외르크, 펠릭스, 미하엘이 강간하고 살아있는 채로 파묻은 건데... 지레 밟힐까봐 겁이 나 자수를 어설피 하는게 인간적이라고 할까. 소름끼쳤던 건 부모의 태도. 외르크의 아버지인 루츠 리히터는 들켰다는 것을 알자마자 자살을 택하지만, 어머니인 마고트 리히터는 자신 아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거 한국이나 외국이나 삐뚤어진 모성애는 똑같구나 싶어서 소름끼쳤다.

  스테파니는 학교 선생님이었던 그레고어 라우터바흐에게 살해당했다. 심약한 라우터바후의 뒤를 받쳐주던 아내 다니엘라가 시체를 수습한 것인데, 이 과정엔 테를린덴 가문 또한 얽혀있다. 티스가 살해장면을 목격했다는 걸 알게 된 다니엘라는 티스에게 치료가 아닌 마약성분의 약을 계속해서 처방하고, 테를린덴은 스테파니의 죽음에 아들 라르스가 얽혀들어갈까봐 스테파니의 시체를 숨기는 걸 돕는것.

  나디야의 일도 여기서 드러나는데, 이 모든 일의 내막을 알고있음에도 토비아스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이 일들을 감춘 것이었다. 여러모로 마을 사람들이 남 인생을 쉽게 망가뜨린 것이었다.

  토비아스 본인의 인생 뿐 아니라, 토비아스 아버지의 인생도 망가졌고, 로라의 아버지 만프레드 바그너는 망가져서 리타를 해쳤고, 뭐 그런 식으로 여러 사람의 인생이 망가졌다. 참 사람이 뭔가 생각하게 만들었던 소설. 추리 자체는 뭐 그렇게 흥미롭진 않았다만... 재미만 있었다 싶은 느낌도 있고. 약간 아쉽다.
타이거타이거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SF소설
지은이 앨프리드 베스터 (시공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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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읽으면 바로바로 쓸 수 있었으면.. 읽은 지 일주일 넘은 거 같은데. 꼭 다까먹고 쓰네ㅋㅋㅋㅋ 하여튼 다류가 빌려줘서 봄. SF계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고 해서 흥미가 있긴 했지만, 또 SF라서 해서 그닥 볼 생각은 없었는데...ㅎㅎ 만나러 갔는데 빌려주길래 읽기 시작. 절판되었다가 다시 잠깐 복간되어서 알라딘에서만 팔고 있는 것 같다. 마음에 들면 사려고 했는데 살 정도로 마음에 들진 않았음. SF가 내게는 안맞아요. 원제가 The Stars, My Destination이던데 왜 한국어 제목은 타이거 타이거로 했는지 모르겠다. 완전 안어울리는 건 아니니까 된건가...

  공간이동 능력인 '존트'가 일상화된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거기에 수준 이하의 노동자 걸리버 포일이 주인공으로 등장. 걸리버 포일이 타고 있던 우주선 '방랑자 호'는 파손되어 우주를 떠돌게 된다. 그 안에서 거의 6개월의 시간동안을 간신히 살아남은 걸리버 포일은 마침내 자신을 구해줄 수 있을만한 우주선, '보가'를 발견. 하지만 보가는 걸리버 포일의 구조신호를 무시하고 지나쳐버린다. 이 분노가 걸리버 포일의 탈출 의지를 불태워 걸리버 포일은 미아상태를 벗어나고, 동시에 보가에게 복수하기 위한 일들을 시작한다는 이야기. 그 탈출 사이에 '현대'의 사회와 전혀 다른 '과학인'들이 사는 곳에 불시착하면서 얼굴에 '방랑자N♂MARD'라는 문신이 새겨지는데 이게 걸리버 포일을 구분하는 일종의 표식이 되어버린다. 문신을 지운 후에도 분노할 때엔 마치 호랑이처럼 얼굴에 문양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여튼간에 또 과학인이 사는 소행성에서 탈출하여 지구로 돌아온 걸리버 포일은 '보가'를 향한 복수를 준비해나간다.

  근데 이 복수의 과정이라는 게 되게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어서 처음에 좀 놀랐음. 주인공 자체가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에드몽처럼 선량한 느낌은 전혀 없고, 무지했던 동물이 복수를 위해 거듭난다는 느낌이어서 그나마의 선한 의지는 막판이 가기 전까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난민인 가족을 둔, 일방 텔레파시 능력자 로빈을 괴롭히기도 하고, 정신병원에 갇힌 뒤 만난 지즈벨라를 배신하기도 한다. 무자비했던 과정들은 교육을 통해 점점 나아지긴 하는데 본성만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 안티 히어로 같은 면모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더라. 그렇다고 프레스타인이나 그의 딸 올리비아, 다겐함과 양-요빌의 편에 서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여타 선량한 주인공들과는 약간 달랐다는 소리.

  방랑자 호에 있던,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PryE 10kg에 의해 걸리버 포일은 여러 사람의 표적이 된다. 본인은 별로 그에 신경쓰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부를 획득하고 '보가'와 관련된 인물을 찾아나가고, 그 최상위에 위치한 프레스타인을 몰락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뒤에 말끔하게 변하는 모습은 확실히 몬테크리스토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보다 저급이라는 건 옆에서 로빈의 코치를 받았다는 데에서 드러나긴 하지만서도 이 정도면 그 이전의 노동자 걸리버 포일이 아니었으니까. 거기서 프레스타인의 딸인 올리비아에게 홀딱 반한건 좀 웃기긴 했다만. 워낙에 본능적인 포일이었던 터라 이해도 갔다. 물론 사랑, 사랑이 모두를 갈라놓지만.

  '보가'호가 방랑자호의 구조신호를 무시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안에 있던 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우주공간에 버리고 있었기 때문. 그리고 이 일의 꼭대기에 올리비아가 있다. 맹인인 자신의 불행에 다른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들어버리는 사람이었던 것. 이 사실을 알고 거의 폭주하게 되는 걸리버의 모습이 재미있었음.

  마지막의 걸리버는 그동안의 '개인적인 복수'의 면모를 모두 지우고 일종의 영웅 역할을 하는데, 판단 자체를 수뇌부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아닌 개인들에게 맡겨버린다. 걸리버 포일에게 무슨 특별한 점이 있어서 '우주 존트'를 실행했건 말건 그건 내게 중요해보이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깨우쳐가고, 성장하는 모습이 좋았음. 그리고 그 성장의 개인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발돋움 한 게 인상깊었다.

  걸리버가 폭주하는 부분에서 굉장히 책에서 쓸 수 있는 표현법을 많이 썼다. 글자를 늘이거나, 키우거나, 모양을 변경하고 배열하는 방식들. 책 안에서 시를 보는 것처럼 신선했음. 순수문학에서 많이 보지 못했던 방식이네요.

  이야기가 재밌고 뭘 말하려는 지는 대충 알겠는데 느낌은 고만고만했다. 확 와닿지 않더라. 인물의 짐승같은 매력으로 커버하기엔 내 취향까진 아니고 재미는 있고...

"너는 누군가?"
"어디에서 왔는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

『타이거! 타이거!』, 앨프리드 베스터, 시공사, 2004, p. 36

  "내가? 나는 살아가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을 되돌려주었어. 일반인들은 우리같이 무리하게 몰아대는 사람들 때문에 오랫동안 매맞고 끌려다녔어. 억지로 몰아대는 사람들...... 세상을 자신들 앞에 꿇어앉히지 않고는 못 배기는 호랑이 같은 인간들이 끌고 다녔다고. 우리는 모두 호랑이야. 우리 셋 다 말이야. 하지만 우리가 대체 뭐길래 강제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의 모든 결정을 도맡아 하려는거야? 이제 세상이 알아서 삶과 죽음 사이를 선택하도록 놔두라고. 왜 책임을 지려 하냔 말이야?"
  양-요빌이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원해서 책임지려는 게 아니야. 우리는 내몰린 거야. 평범한 사람들이 피하고 있는 책임을 대신 지도록 강요받고 있는 거라고."
  "그럼 피하지 못하게 하라고. 자기 의무와 죄를 맨 처음 그걸 잡은 기형아의 어깨에 떠넘기지 못하게 하라고. 언제까지 세상의 속죄양 노릇을 하며 살 생각이야?"

『타이거! 타이거!』, 앨프리드 베스터, 시공사, 2004, p. 376

내 이름은 걸리버 포일.
내 나라는 지구.
내가 머무는 곳은 깊은 우주.
그리고 내 목적지는 별들.
 
『타이거! 타이거!』, 앨프리드 베스터, 시공사, 2004, p. 381
바이킹:오딘의후예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역사소설
지은이 팀 세버린 (뿔(웅진문학에디션),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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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형제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팀 세버린 (뿔(웅진문학에디션),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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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킹의 삶을 다룬 팀 세버린의 팩션. 갑자기 바이킹 이야기가 너무 읽고 싶어져서 발병났었을 때 이 책을 알게 됐는데, 그 당시엔 1권인 오딘의 후예만 나와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꽤 지난 후라서... 2권이 안나올 것 같은 두려움에 안샀었는데, 2권이 나오면서 두개 같이 삼. 트릴로지라 아직 3권이 출판되어야만 한다. 2권까지 출판해놓고 3권 출판 안해주면 진짜 출판사 악마....

  작가가 이쪽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소설마저 자연스레 읽힌다. 아이슬란드의 전설들을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새롭게 만든 이야기라지만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이렇게 살았겠구나 싶었다. 그 몇몇 부분이라는건 옛 신앙, 즉 오딘과 북구신들을 믿는 주인공 토르길스의 영적 능력에 관한 부분인데... 요건 뭐 소설적 픽션부분이라서. 이 부분만 빼면 나머지 생활상은 참 자연스럽고 완벽하게 그려냈다. 역사소설로서의 가치도 뛰어난 듯. 난 바이킹 생활사를 알고 싶었던 거라서 그 부분에서는 굉장히 만족했다.

  첫 권은 토르길스의 성장배경에 관한 이야기들. 아직 토르길스가 어떤 능력을 갖추기 전인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흥미진진했다. 특히 수도원 이야기가 가장 인상에 남았음. 빈란드의 대학살은 오히려 와닿지는 않았고... 어쨌든 첫권까지만 해도 애가 좀 덜자랐다, 한 북구 사람으로서 확고하진 않구나 그런 느낌이 강했는데 점점 성장하는 모습이 보여서 좋았다. 두번째 권에서는 전사로서도 좀 자라고 그러는데, 확실히 토르길스 자체가 굉장히 뛰어난 전사라는 생각은 안든다. 다른 쪽에서 재능을 보이긴 하지만 그게 막... 천재적인 느낌은 아니어서 더 좋았음. 일반 사람이 어떻게 고생해서 어떤 사건들에 휘말릴 수 있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그런 게 느껴지니까. 사랑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고달퍼 하는 모습들이 보기 즐거웠고, 사람들을 하나 둘 잃어가며 가슴 속에 굳은 의지가 생기는 것 같았다. 특히 의형제인 그레티르와 관련한 일들은 심장이 바짝 쬐어들었다. 난 배드엔딩 안좋아하는데, 그레티르는 처음 봤을 때부터 느껴졌다. 얘가 어떤 식으로 죽어갈지가 보여서 슬펐다. 그래서 더 애정이 가고 좋았던 캐릭터였음. 너무 바보같이 우직하고 자기를 변호할 줄 모르긴 하지만 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솔직하고 순진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옛 북구인의 생활사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고, 소설 자체의 재미로서도 떨어지지 않았음. 만족했다. 제발 3권만 나와줬으면. 제발.
겨울여행
카테고리 소설 > 프랑스소설
지은이 아멜리 노통브 (문학세계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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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은지 거의 삼주 다 되어 가는 듯. 너무 쓰기 귀찮아서 그만... 내용 더 까먹기 전에 쓴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문학세계사는 표지 디자인을 더 신경쓸 필요가 있다. 이번에 아멜리 노통브 책을 좀 샀는데, 책 표지들을 보면 한숨이 나오는 건 문학세계사 버전. 그나마 살인자의 건강법과 적의 화장법은 문학세계사 거 치고 괜찮긴 했다만 열린책들 표지와 비교되는 건 사실이다. 겨울여행이 그 표지들 중 가장 심한듯 하다. 물론 내용이 가장 중요하지만 때로는 포장도 중요한 법이에요.

  산 다른 책들은 이미 읽어봤거나, 혹은 유명해서 샀는데... 이 책은 시간인데 그냥 샀던게 책 소개가 마음에 들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사랑을 위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이름의 첫글자를 연상시키는 건축물을 비행기로 폭파시키려 하는 내용. 황당무계하지만 이런 막무가내식 설정이 마음에 들어서 사게 됐다.

  주인공 조일은 평범한 남자. 그러다가 일하러 들른 집에서 아름다운 여자 아스트로라브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알리에노르 라는 이름의 작가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알리에노르는 아스트로라브가 맹목적으로 보살피고 있는 정신지체가 있는 작가. 조일은 아스트로라브에게 끊임없이 구애하지만 항상 그 사이에 껴 있는 알리에노르 탓에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그의 사랑은 점점 간절해지고 커가는데 아스트로라브는 수동적이고 또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어느정도 사랑이 풀려나갈 때 조차도 아스트로라브는 많은 것을 내어주지 않는다.

  알리에노르가 내뱉는 말들이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진 않지만, 말보다 드러나는 행동과 상황 같은 것들을 보면 의외로 가장 묵직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녀는 소설 내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다. 왜냐하면 조일이 하는 행동은 아스트로라브에게 관련된 것이고, 아스트로라브의 행동은 또한 알리에노르에게 통하기에.

  사랑때문에 너무 힘이들어 아스트로라브를 사랑하는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에펠탑을 파괴하려는 조일은, 대책없는 낭만주의자이다. 그의 생각 속에서 현실과 상상은 마구 뒤섞여 있는 듯 하다. 실제로 깨진 병 하나로 비행기를 납치할 수 있는 확률은 매우 적지만, 그는 그것을 굳건히 믿고 있다. 보는 나조차도 왠지 설득되어버린다.

  실제로 조일이 비행기를 납치 하는지, 안하는지보다는 그에 깔린 면면의 생각과 감정들이 중요했던 이야기. 조일이 납치에 성공했을까? 그건 중요치 않다. 조일이 아스트로라브에게 자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었을까? 난 그것만큼은 전자의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성공했을 거라 본다.

  가볍지만 괜찮았다.
우아한거짓말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청소년소설
지은이 김려령 (창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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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거스미스 다 읽고 읽기 시작한 책.. 인데 금방 읽었다. 워낙 짧기도 하고 잘 읽히는 글이라 후딱 읽음. 같은 작가의 작품인 완득이때와 다르지 않았다. 이 작가 참 글이 잘 읽힌다. 청소년 문학이라고 타겟을 잡고 나와서 그런가 딱히 어려운 말들을 쓰는 것도 아니고, 대화 위주로 돌아가서 글이 쉽게 쉽게 읽힘. 그리고 그 대화라는 것들도 실제 일상에서 쓰이는 대화같은 맛이 있어서 재미가 있다.

  소재가 좀 특이해서 샀는데, 읽고 나니 소재에 비해 흔한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할 건 이 쪽이 많긴 한데 완성도 쪽은 완득이 쪽이 높은 것 같다. 그렇다고해서 이게 재미없었단 건 아닌데 작가의 역량이 다 발휘되었다는 느낌이 아니어서 아쉬웠다.

  어느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자살한 소녀 천지.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 천지의 엄마, 동생 만지, 친구 화연, 미라의 이야기. 미라의 언니 미란의 이야기도 있고, 그들의 아버지, 옆집의 오대오 아저씨까지 오밀조밀하게 이야기가 이어져 있다. 천지가 죽기 전까지의 상황이 많이 나타나는데 인간관계에 얽힌 게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친구인 화연과 미라와의 관계가 가장 흥미로웠다. 화연이 약은 여우타입은 어디에나 있어서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었고, 미라같이 깊게 발들이진 않으며 적당히 간섭하는 수준의 애들도 많으니까... 고 나이대의 사회를 잘 잡아낸 것 같았음. 엄마와 만지와의 관계는 틀어짐이라기보다는... 일상에의 무심함? 이런게 드러나서 좋았다. 천지 주변의 관계 말고 엄마와 미라 아빠와의 관계도 흥미로웠고...

  이미 죽어버린 상황에서 시작해서 어떤 해결이 나온다기보단, 주변을 되짚어가는 그런 느낌이어서 내가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다. 다시 생길 수 있는 다른 문제의 해결이 제시되긴 했지만 그건 뭐 천지와 더 이상 인연이 없는 이야기니까.

  이 책은 아마도 사촌동생 줄 듯ㅋㅋㅋ 그래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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